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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남양주 봉선사 목조불좌상 - 2024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종교본찰봉선사

by wanderlust-diaries 202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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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목조불좌상

촬영

 

불교중앙박물관은 2024년 교구본사 특별전 종교 보험 봉사사를 중심으로 경기 북부 불교 문화의 정수를 비추는 <큰 법해 바다의 성립. 종교 보험 봉사사>를 개최합니다. 고려시대 법인국사가 운악사에서 창건한 봉선사는 조선시대 세조부부의 염원이 담긴 왕실원찰이다. 교종 본찰로서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습니다. 근현대는 항일독립운동과 교육불사로 불교의 대중화에 주력한 수많은 선지식의 원력이 지금까지 살아가는 도량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 한자리에 모인 봉젠지 본사와 말사의 귀중한 성경을 통해 바다처럼 깊고 넓은 부처님의 세계를 누리십시오.

 

전시 기간 까지.

 

류몬지의 관음 보살 금동 관음 보살 좌상/고려 14세기, 금동, 용문사 관음전, 보물 경기북부를 대표하는 고려 14세기 관음보살로 1910년 강원도 요코성 봉복사에서 모셔져 왔다. 보살님은 가부좌의 자세에 설법인을 취하고 있어 양 어깨를 덮고 있는 형식의 대의를 입고 있다. 이런 밑단의 밑단, 띠 매듭, 쇠장식 장식 등은 고려 14세기 중엽에 유행한 특징이다. 1 봉선사 산문을 연다. 운악산이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고 왕사천이 매우 흐르는 남양주의 명당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는 969년 법인 국사탄문 스님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열었다. 그 후 세조와 정희왕후의 인연으로 사세가 새롭고 교종을 대표하는 사원으로 지정되는 등 조선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거듭났다. 수많은 전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고한 사격을 지켜온 봉젠지는 오늘,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구의 본사이며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최초의 사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있다. 봉선사의 창건과 역사 봉선사의 역사는 969년 법인국사의 탄문 스님이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열기 시작한다. 대가요로서의 사세는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인 광릉을 위한 사원에서 불사를 지원하고 정비하며 1551년에는 나라에서 교종을 대표한다. 사찰로 지정할 정도로 위상이 각별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 25전쟁 등 전란으로 큰 피해를 보았지만, 절을 재건하는 불사는 계속된다 계속되었다. 오늘 봉선사에 전하는 성관은 위기 속에서도 단절되지 않았던 봉선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봉선사가 표시된 지도 양주지도(조선) 1872년 종이에 채색, 서울국립대학 양장각 한국학연구원. 왕명에 의해 양주목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지도다. 양주목의 행정중심지인 읍치를 중앙에 배치하여 양주목 일대를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중앙에는 봉선사와 그 아래에 산조와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이 위치하고, 봉선사가 광릉의 능침사찰이었음을 한눈에 나타내고 있다.

 

봉선사 창건주 탄문수사 기록 법인국사비 탁본/흥선승려, 대한민국 2024년 종이에 먹고 불교중앙박물관. 봉선사의 산문을 처음 열었다고 한 탄문 스님의 생애와 실적을 기록한 비의 탁본이다. 탄문 스님이 입적한 3년 후인 978년에 지어진 것으로 니시야마 호바라지의 흔적에 남아 있다. 고려태조에서 경종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왕의 스승으로 활동하면서 존경받고 있던 탄문 스님은 969년 운악산에서 산문을 열어 운악사라고 명명했다.

 

봉선사가 쓴 편액 봉선사 편액/근현대, 나무, 봉선사 운하당. 봉선사 경내 운하당의 건물에 걸려 있으며 검은 배경에 봉선사, 봉선사의 문자를 음각하여 흰색으로 바르고, 편액 주변에 연꽃과 덩굴 모양을 그려 장식했다. 편액은 서예가 김기순의 문자로 굵은 하사로 쓴 유려한 붓치로 생생하고 힘을 느낄 수 있다.

 

부처와 몸 안에 봉안된 달라니 목조 불좌상, 복장 유물/목, 종이, 봉선사, 경기도 문화유산 자료. 봉선사에 모셔진 나무로 만들어진 부처님이다. 오른쪽 어깨를 노출하는 한쪽 끝 오른쪽 개의 착의에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수의 자세로 얼굴과 밑단 등으로 17세기 초의 양식을 보여준다. 복장의 유물로 달라니가 확인되었지만, 그 후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복장의 유물.

 

봉선사의 역사가 있는 종 범종/천보승 등 조선 1619년, 청동, 현등사 극락전, 보물. 1619년 봉선사에서 텐포 승려를 비롯한 5분의 승려가 조성한 범종으로 전쟁 이후 마사인 현등사로 옮겨왔다. 바디 하부에는 종을 주조해 남긴 기록이 새겨져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열린 봉선사 사찰 복구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전시장의 모습

 

설명하는 아미타 부처 아미타 불회당/우에오 승려 등 일제강점기 1917년 면에 채색, 봉선사 방적당. 1917년 용문사에서 열린 불상 개금 불사와 함께 조성된 불화로 현재 봉선사 방적당에 봉안되고 있다. 불화는 아미타 불상을 중심으로 8분의 보살을 양옆에 배치해 주위에 시천왕, 십대제자, 타방불을 그렸다. 아미타 불은 나뭇결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자리에 앉아 있고, 양손 모두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채색은 적색을 주로 사용하며 녹색과 황색을 배합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살의 보관 장식이 드물다.

 

지성광 부처와 북두칠성 지성광 불회도/상규승 등 대한제국 1903년 면에 채색, 봉선사 삼성각, 경기도문화유산자료 1903년, 상규 승려와 소원 승려가 조성한 불화로, 당시는 원흥사에 모셔져 있으며, 지금은 봉선사 삼성각에 봉안되고 있다. 치성광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닛코, 월광보살님과 칠성을 상징하는 칠불과 시나하라성군을 배치했다. 화면 상단에는 색운 속에 좌우 별자리를 상징하는 삼태육성을 표현했다. 착색은 빨강, 초록, 파랑을 주로 사용하고, 치성광부의 광배는 금박을 사용해 화려함을 자아내고 있다.

 

인연을 스스로 깨달은 수행자 독성도/약효승려 등 대한제국 1903년경 면에 채색, 봉선사 삼성각, 경기도문화유산자료 약효승려가 출초하여 원흥사에 봉안했다고 알려진 이 불화는 1903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의 두광을 갖춘 채 바닥에 앉아 있는 독성의 존자는 왼손은 석장, 오른손에는 영지를 가지고 있다. 양측에는 오만한 진각의 거장과 두 명의 동인이 위치해 화면 곳곳에 학, 거북, 소나무, 영지, 바위 등 수리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의 요소를 표현했다. 이 불화는 약효승려가 밑그림을 그리고 봉법승, 대호승이 함께 조성했다.

 

해인사에 봉안된 세조의 진영 세조대왕 진영/조선 1458년, 실크, 종이에 채색, 해인사 성보박물관, 경상남도문화유산자료 사원에서 조성된 세조의 초상화인 진영이다. 화기에 따르면 1458년 윤살로와 조석문이 세조의 이름으로 진영을 조성해 해인사 금탑전에 봉안했다고 한다. 세조는 곤룡포를 입은 채 양손에는 홀을 쥐고 있어 호랑이 가죽을 입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해인사는 1458년 고려대장경 인경을 계기로 세조와의 인연을 이어가며 이러한 배경으로 진영을 조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탁 초상화의 스케치 세조된 초본/김은호, 일제강점기 1935년 종이에 먹고 국립고궁박물관. 세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의 스케치다. 여섯 장을 묶은 얇은 종이 위에 식선으로 익선관을 사용해 곤룡포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세조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하단에는 김은호의 인장이 남아 있어 1935년 이왕직으로 세조된 것을 묘사할 때 옮겨 그린 스케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봉선사의 야마노리 승려가 봉선사 옆에 있던 봉성전의 세조 어진을 지킬 만큼 봉선사와 세조 어진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봉선사와 광릉 조선의 7대 국왕세조와 왕비인 정희왕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온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의 다양한 사원을 세우고 세우는 것을 주도해 간경도감을 통해 수많은 불서를 세상에 보급하기에도 앞섰다. 특히 정희왕후는 세조의 매장된 광릉을 위해 봉선사의 중창을 주도함으로써 세조의 극악왕생을 함께 발원했다. 두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발원은 조선 전기불교문화의 중흥을 이룬 원력이었다.

 

정희왕비의 인장 정희왕후 가상(가상) 정호옥보 / 조선 1471년, 옥석, 비단끈, 국립고궁박물관, 보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왕실의 구성원을 높이고 부르는 정호를 상징하는 의물인 어寶이라고 불리는 인장이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여러 번 존호를 받고 있으며, 이를 상징하는 인장 2과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 인장은 1471년에 받은 정호에 의해 조성되었다. 2 불교, 경기 북부를 물들인다.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와 일부 마사들은 경기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현란한 불교문화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탁월한 수행과 가르침으로 존경받는 3명의 노인 지공, 나영, 무학승려의 인연이 전해져 조선왕실 구성원의 절실한 염원도 도량 곳곳에 남아 있다. 근대에는 불교회화를 조성하는 중심지로서 기능하여 많은 성관이 조성되었다. 이 역사를 똑같이 유지 봉선사봉, 마르사의 많은 문화유산은 오늘까지 경기북부지역을 장대하게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부대중에게 증명하고 있다. 사원이 안고 있는 왕실의 염원 불교는 조선왕조에서 이념적으로 억압됐지만 왕과 왕비, 대군, 공주 등 왕실의 수많은 멤버들은 불에 대한 예경을 대대로 이어받았다. 무엇보다 도성에 가깝고 호랑이, 엔, 무덤과도 인접한 경기북부지역의 사원은 조선왕실의 기도처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여기서 선왕, 선후 등 극악왕생을 빌려 발원자의 복락을 발원하는 수많은 불사를 주도했다. 절실한 왕실의 염원은 성관을 통해 지금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다.

 

전시장의 모습.

 

대한제국황실이 개금한 관음보살 목조 관음 보살자리 동상, 복장 유물/무염 승려 등 조선 1649년, 나무, 종이, 불암사, 보물 1649년 무염 승려가 조성한 보살로 불암사에 모셔져 있다. 조성은 오스즈지 묘연암에 봉안하려고 무염승려 등이 함께 조성하고, 개금은 대한제국황실과 관련된 강재희가 시주해 긍정승려가 진행했다.

 

조선왕실원당의 회암사의 역사를 증명하는 성보 회암 사지 출토 유물.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회암사의 위용을 보여주는 성보다. 청동금탁에는 개국 초왕실과 회암사의 관계를 나타내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수막에는 효령대군 선덕갑인 5월이라는 명문을 엠보스했지만 이는 효령대군의 발원으로 회암사의 불전을 수리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한다. 또, 회암 사지 발굴 조사에서 6점의 청동 다리가 출토되어, 이 청동 다리는 회암사의 500 성전에서 사용된 그릇임을 나타내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청동 발 / 조선 전기, 청동, 동국 대학 박물관.

 

청동금탁/조선 1394년,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수도/조선 1434, 터키, 국립중앙박물관.

 

약제사 불회당/이자실 등 조선 1565년 실크 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우에미야 최씨가 왕실의 장수를 출원한 불화 지조 보살도/히로카타 승려 등 조선 1792년, 비단에 채색, 흥국사시 왕전,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1792년 왕실발원으로 <시왕도>, <사자도>와 함께 조성되어 현재 흥국사시왕전에 봉안되고 있다.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협시의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육대보살님을 양옆에 배치했다. 화기가 일부 소실되었지만, 동시에 제작한 다른 불화의 화기를 통해, 우에미야 최씨가 정조와 효의왕후 등 왕실 일원의 장수 때문에 출원해 제작에는 연홍승려와 3명의 승려가 참가한 것을 알 수 있다.

 

흥선 오하라군이 발원한 팔상도 팔상도/영석승 등 조선 1869년 실크에 채색, 흥국사. 1869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왕실 관련 인물들이 발원해 제작한 불화다. 총 8 폭으로 구성되어 각 폭에 3 5 장면을 배치했습니다. 구름, 나무, 전각 등을 이용하여 각 장면을 구별하여 화제를 적었다. 흥미로운 점은 제작 당시 서울 경기 일대에서 유행한 팔상도가 아니라 통도사 팔팔도 초본을 활용해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제작에는 감석 스님과 16명의 스님이 참가했지만 기근 스님은 전통적인 주문 양식을 계승해 서양화법인 음영 표현을 구사했다.

 

신정왕후가 발원한 미즈키 관음도 수월관음도(유경경 승려), 조선 1850년, 비단 채색, 현등사 보광전,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1850년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발원으로 조성된 불화다. 넘치는 해수 위에 솟은 바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관음 보살을 중심으로 용왕, 선재동자, 권속이 양옆에 위치해 하늘과 바다를 경계하는 구름에 사천왕을 배치했다. 하늘에는 동적인 자세의 백의 관음 보살을 표현했다. 불화는 ‘수월도량 공화불사, 수월도장 공화 불사’의 일환으로 조성했고, 제작에는 유경 승려와 12명의 승려가 함께 했다. 이 불화는 19세기 왕실 주도로 진행된 천도발원의 일면을 보여 관음신앙의 변화상을 볼 수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영은대군을 위해 본 사리 3층 석탑 사리장 머그/조선 1470년경, 은, 수정, 현 등사. 현등사 3층석탑 내부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의 갖추어져 사리 2과와 수정사리병, 은으로 만들어진 원통형 사리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세종 아들의 영응대군의 극악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부인 송씨와 딸, 의리의 딸이 시주하고, 1470년에 봉안했다고 생각된다.

 

왕실 여성의 소원을 담은 성보 팔각5층석탑봉안성보/조선15세기, 금동 등 수종사(불교중앙박물관), 보물. 1493년 이전과 1628년 2회에 걸쳐 수종사 팔각5층석탑에 봉안한 성보다. <금동 불감>의 안팎에 부처와 보살님을 부조로 장엄하고, 내부에는 다양한 부처님과 보살님을 모셨다. 석가문불의 명문에는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가 본 사실, <복장발원문>에는 1493년 성정의 후궁인 숙영헌씨 등이 무거운 사실이 적혀 있다.

 

<금동 불감> 안팎에 부처님과 보살님을 부조로 장엄했다.

 

왕실 여성의 소원을 담은 성보 팔각5층석탑봉안성보/어른의 승려 등 조선 1628년 금동 등 수종사(불교중앙박물관), 보물. 1493년 이전과 1628년 2회에 걸쳐 수종사 팔각5층석탑에 봉안한 성보다. 석탑의 옥석 등 다양한 부재로 발견된 다수의 불상은 1628년 어른의 스님이 조성하고, 인목왕후가 중생 구제를 위해 발원했다. 신체 비례, 상호 표현 등으로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정혜 옹호를 위한 사리 사리탑 사리장 옴구 / 고려마 조선촛 등, 청자 등, 슈종사(불교중앙박물관), 보물. 조선태종의 딸인 정혜옹주를 위해 1439년 수종사로 조성된 사리타워에 봉안한 사리가 갖추어져 있다. 14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호문 유개호, 내부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금동구층 소탑, 조선 전기 살리기의 양식을 나타내는 은제 도금 육각당형 살리기 등이 있다.

 

14세기 중국에서 만든 청자호문 유개호

 

은도금의 육각당형 살리기의 뚜껑을 연 상태

 

금동 구층 소탑

 

세탁의 명복을 기원하고 만든 종 범종탁책/흥선승려, 대한민국 2022년, 종이에 먹는, 불교중앙박물관 1469년 왕실발원으로 만들어진 대형범종의 탁본이다. 세조의 생명을 기도하기 위해 종을 제작했다. 명문에는 세조의 덕을 칭찬하는 내용과 종을 제작한 경위 그리고 제작자가 쓰여 있다. 경기북부 불교미술 경기북부지역은 수도권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정치와 경제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왕실과 귀족의 지원과 문화적 영향을 가장 가까이서 받을 수 있었다. 불교미술에는 이런 흔적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 본선사봉, 마르사의 성보를 통해 경기북부의 불교문화를 깊이 느낄 수 있다.

 

숨구멍. 나영, 무학삼이미지 고려말 조선 최초로 활동하고 불교계에서 높게 존경받아 온 삼화상인 지공, 나영, 무학승은 불교의 깊은 이해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인도 출신의 지공 스님은, 가섭존자로부터 법력을 전해진 108대 조사이며, 그 제자인 나연 승려는 고려공민왕의 왕사로 활동해 불교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문하의 무학승은 조선태조의 왕사이며, 나연 스님이 중창한 회암사에 머물며 선대의 두 명의 스님을 심양하기 위한 불사를 추진했다. 오늘날 회암사에 전해지는 세분의 묘탑과 최근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환수된 부조리는 이 인연의 증거입니다. 시대를 넘어 한국사회 전반에서 존경받아 온 미타카승의 지위를 증명한다.

 

산수 병풍을 배경으로 매트로 장식된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의 무학 스님 진영

 

무의 배경에 매트로 장식 된 바닥에 앉아 외관 숨구멍 승려

 

나영 스님 진영

 

나연 수도사 샐리 보제존자탑 사리장 옴구/고려 1388년, 청자 등, 국립 춘천 박물관. 보의존자라고 불린 나연 승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1388년에 조성된 사리의 모임으로 일제 강점기 때 원주 영천사에 있었다 보존자의 탑에서 수습했다. 주탑과 동탑에서 다양한 재질의 그릇과 공양물이 확인되었지만, 이는 고려말 조선 최초의 사리가 갖추어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탑 숫돌에는 사리 갖추어진 조성 등에 대해 기록했다.

 

화소의 명칭이 나타나는 현판 위축연판문 현판 / 조선 1856년, 나무, 흥국사 보름달 보전. 흥국사 보름달 보전에 달려 있는 2개의 현판은 보름달 보전의 중수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한다. 현판에는, 각각 왕실에 대한 축원 및 시주자 명부, 단청에 참가한 화소의 명부를 열거했다. 화소에 수록된 스님들은 19세기 흥국사 불화 제작에 참여한 화승으로 당시 화소의 기능을 완수한 흥국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자의 승려가 그린 지장 보살 본원경의 한글 해설서 지장보살본원경 언론/감석승려 등 조선 1879년 종이에 인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교정사가 간행한 지조 보살본원경을 번역한 불서로, 변상도는 19세기에 활동한 응석 스님이 맡았다. 판상도에 표현된 독특한 연화 받침대에 앉은 석가모란 불은 달콤한 승려의 승려의 불화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용헬리 모양의 입안의 여주에도 무늬가 새겨져 있다.

 

영환의 승려가 만든 울타리 甘露圖(영환圖)/에이하타 스님 등, 조선 1868년, 실크에 채색, 흥국사 대웅 보전. 1868년 흥국사 대웅보전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화다. 화면 상부 칠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 지장보살, 인로왕 보살님 등 다양한 존경을 표현했다. 중단에는 다양한 공양물과 꽃을 든 시식단과 의식을 추진하는 스님들이 위치한다. 하단에는 한 쌍의 귀신과 죽음의 장면,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장면 등을 표현했다. 불화의 제작은 영국 승려가 주도하고 불화소인 흥국사에서 조성된 이 불화는 서울, 경기 일대에서 활동한 화승들 사이에서 공유되며 화면 구성과 그림이 비슷한 감탄도가 등장한다.

 

긍정적인 스님이 만든 감각 甘露圖/긍법승려 등 조선 1890년, 비단 채색, 불암사,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1890년 불암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화다. 화면 상단의 칠불, 중단 시식단과 그 앞에서 범패와 작법을 준비하는 모습, 하단의 한 쌍의 귀신과 줄다리기 공연을 한다 유희가게 같은 풍속화의 장면과 죽음의 장면에서 전체 구도와 도상이 흥국사의 감로도와 비슷하다. 불화 제작은 긍정 스님이 주도했다. 정법승려는 19세기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스님들과 협력하면서 잔디를 공유했고, 그들은 비슷한 불화를 조성했다.

 

달콤한 스님이 만든 감 甘露圖/甘石僧丶 등 조선 1898년 실크 채색, 보광사 대웅보전,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1898년 보광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화다. 흥국사, 불암사<감로도>와 화면 상부에 일렬로 배치한 칠불, 중단에 위치한 한 쌍의 귀신과 시식단의 모습 그리고 하단의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장면 등 화면의 구도와 그림이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제작에는 달콤한 아빠와 네 명의 아빠가 함께했다. 흥국사와 불암사, 그리고 보광사의 <감로도>를 조성을 주도한 수파순은 모두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초본을 공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사 씨 범정, 범종/천보승 등 조선 1634년, 청동, 보광사 대웅보전, 보물 1634년 텐포 스님의 주도로 조성된 종으로 덴포 스님이 1619년에 제작한 현등사 <범종>과 유사하다. 상단에는 연곽대, 보살님, 진언을 새겨, 중단에는 명문, 하단에는 파도, 용을 표현했다. 명문에는 조성 배경 등을 기록했다.

 

용뉴의 모습

 

방해하다

 

하단에 새겨진 용.

 

삼성상인의 석가모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왼쪽에서 본 홍배 모습.

 

오른쪽에서 본 광배의 모습

 

종이로 만든 연꽃 연화, 연꽃/시즈나 스님, 종이에 염색, 전통 지화 보존회.

 

달콤한 승려가 만든 신중함 신정도, 신중경/감석승려 등 조선 1883년 면에 채색, 회룡사 대웅전, 경기도 문화유산 자료. 1883년에 흥국사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화로 현재 회룡사에 있다. 깃털이 달린 투구를 사용하고 있는 위태강을 중심으로 상부에 제방강과 제이시강이 위치해, 역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주위에 다양한 존상을 배치했다. 조성에는 달콤한 승려와 5명의 승려가 함께 있었다. 배치와 구성이 비슷한 신중도가 서울, 경기 일대에서 제작되고 있다 흥국사 화소에 기초하여 활동한 화승들 사이에서 불화의 초본이 공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환영, 달콤한 승려의 승려가 만든 아미타 불회도 아미타 불회도/환익 스님 등 조선 1853년 실크에 채색, 봉영사, 경기도형 문화유산. 1853년 봉영사에서 조성된 불화다. 높은 불단에 앉아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는 관음보살님과 오세데라보살님이 정병과 연꽃의 가지를 잡은 채 시립하고 있다. 주위에는 네 명의 보살과 아난 존자, 가섭존자 등 다양한 존상을 배치했다. 불화의 제작에는 달콤한 승려와 환익의 승려 등 11명의 승려가 함께 있었다. 이중 달콤한 승려는 세기 서울 경기 일대 불화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선한 승려가 만든 지장시 왕도 지조시 왕도/신선승려 등 조선 1828년 실크에 채색, 봉영사 관음전,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1828년 중흥사에서 열린 단청불사와 함께 제작한 불화로 현재는 봉영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다. 정사각형의 받침대에 앉아 있는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합창한 채 서 있다. 보살의 주위에는 10명의 시왕, 판관, 나찰, 동자 등 다양한 존상을 배치해, 화면 상단에는 색 구름으로 여백을 바르고 바닥에는 매트로 장식했다. 제작에는 신선한 승려와 6명의 승려가 참여했다.

 

흥국사 16분 한국 16나한상/조선전기, 흥국사 나한정, 보물 흥국사의 나하전에는 16분의 나하와 함께 제석천, 사자, 인왕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의 표정과 얼굴 주름으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나하와 제이시카와로부터의 기록에 의해, 1650년의 중수 사실과 1891년의 고산 안심 사약 사암으로부터 모셔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달콤한 승려가 만든 나핸드 16 나한도 / 감석 스님 등 조선 1892 년 실크 채색, 흥국사 나하전 1892년 흥국사에서 제작한 불화로 하나의 화면을 4매스로 분할하고, 4분의 나하를 각 매스에 그려 총 4점을 제작해 16분의 한일을 그렸다. 나한은 산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배경, 자세, 기물 등이 모두 달라 다채롭다 배경 산수에 전망을 적용하여 화면의 깊이감을 준다. 불화의 조수는 달콤한 승려를 포함한 12명의 승려가 함께 있었다. 같은 초본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화면 분할 형식의 나한섬이 서울 경기 일대 사찰에서 확인된다.

 

현등사의 지장 보살 청동지장보살자상 / 설훈승려 등 조선 1790년 청동, 현등사지장전, 경기도 타입문화유산 1790년, 현등사 지장암에 봉안한 지장보살님으로 어깨가 넓고 보살님의 높이에 비해 무릎이 넓고 안정된 비례를 갖췄다. 바닥에 새겨진 발원문에 따르면 제작에는 설훈 승려 등이 함께 했다.

 

회암사 부처와 몸 안에 봉안된 발원문 목조불좌상, 복장유물/상정승려 등 조선 1755년, 나무, 종이, 회암사,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용흥사 상선암에 봉안된 부처님으로, 현재는 회암사에 모셔져 있다. 대의 밑단은 중앙에 「S」자형으로 접혀져 있지만, 이것은 상정 승려의 특징이다. 복장의 유물인 ‘발볼리원’에는 조성 배경과 상정 승려 등이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조 부처님 자리 동상.

 

복장의 유물인 발보리원

 

보광사의 미륵보살님과 제화 갈라보살님. 목조 미륵 보살 입상, 목조 꽃 갈라 보살 입상/영색 승려 등 나무, 보경사 대웅 보전, 경기도 타입 문화유산. 1633년 양주회암사에서 조성된 보살로 1898년 보광사로 모셔졌다. 발원문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수기 삼존의 협시보살님인 야성보살님과 제화 갈라보살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성에는 영색, 성근 스님 등이 참여했다. 3 선지식, 미래를 꿈꾸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도 봉선사는 법 등을 더 밝게 비추었다. 월초, 지월, 운하의 승려와 봉선사의 선지식은 항일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민족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서 있었다. 후대 승려들을 위한 승가교육체계 확립을 이루고, 아카츠학교와 광동학교 등 근대교육의 거점 구축에도 힘을 쏟았다. 광복 후 불의 가르침을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하기 위해 한문성전의 한국어 번역 불교와 불교의 대중화에 주력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한국불교의 모습은 봉선사의 수많은 선지의 노력으로 마련한 공적이자 그들이 꿈꾸던 미래였다.

 

조사 전의 기둥에 걸린 문장 조사 전 주연 / 근현대, 나무, 봉선사 조사 전 병화로 사라진 봉선사를 다시 일으킨 계민승려와 재건불사에 진력한 월초 스님 등 근대봉선사 승려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 전 주련이다. 정면 3사이로 구성된 조사 전 기둥마다 목판으로 만들어진 주련을 걸어 총 4개의 주련이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검정색 배경에 음각으로 글자를 새기고, 흰색을 묻혀 상단에는 푸른 연꽃 잎, 아래 부분에는 빨간 연꽃을 장식했다. 주련의 글은 운하 스님이 세워 석주승이 썼다.

 

운하 스님이 쓴 일기 탁상일기/운하승려, 대한민국 79년, 종이에 잉크, 운하기념사업회 운하 승려의 일기로 시중에 판매하는 일기에 내용을 작성해, 표지를 직접 제작해 손수 만들었다. 역경 진행 과정과 내용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이 밖에 동국역 경원을 설립하여 운영할 때까지의 내용이 꼼꼼히 수록되어 있다.

 

운하 스님의 유언장 다경실유촉/운하승려, 대한민국 1972년 종이에 먹고 운하기념사업회 운하의 승려는 세수 89세, 법정 59세의 나이로 봉선사에서 입적했다. 유언장은 입적 전인 에 작성되어 제자들에게 남긴 10개의 당부가 포함되어 있다.

 

운하 승려 캐릭터 운하 승려 유적/운하 승려, 대한민국, 동국대학박물관 「천년도 핵장 청매, 천년 복숭아 핵장 청매」는 <선문염송>에 실린 중국 오대 취암 스님의 게재로, 석가원불이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가창을 줬다. 하부에 승려의 법호와 낙관이 남아 있어 붓치로 승려의 직립한 인격을 느낄 수 있다. 천년도 핵장 청매, 천년 복숭아 핵장 청매 천년 묵은 복숭아씨로 푸른 매화가 열린 격리이다.

 

운하 스님이 사용한 것 운하 스님 유품/근현대, 가죽 등 운하 역사 기념관 운하의 스님이 사용하고 있던 유품으로, 가죽 장갑, 동다관과 받침대, 돋보기, 안경과 안경집, 회중 시계와 케이스, 패엽경, 부채 각 1점, 인장 6점과 인장가 1점이 전해드립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붓을 두지 않고 역경에 임한 스님의 일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히가시 다관.

 

운하 승려가 받은 문화훈장과 훈장증 문화훈장, 훈장증 / 대한민국 1962년 금속 등 운하기념사업회, 운하역사기념관 불교의 대중화와 불경의 한국어 번역에 평생 노력한 운하 승려의 공로를 기리며 1962년 정부가 추구한 문화훈장이다. 운하의 스님은 역경 활동을 통해 모두가 불의 말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불경의 번역에 전념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오늘의 봉선사

 

설법되는 삼분의 부처 주작이나 산신촛불/각 총승려 등 조선 1735년 종이에 채색, 봉선사, 보물 촛대는 영산재, 천도재 등 야외 의식에서 사용되는 대형 불화이다. 종이 30장을 붙인 일폭으로 그린 ​​이 촛대 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노사나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 삼분을 크게 그렸다. 하단에는 좌우 대칭으로 6개의 보살과 범천, 가섭, 아난을 포함한 10명의 제자와 천인, 주낙천인, 용왕, 용녀를 표현했다. 또 불길이 솟아오르는 현실적인 부처님 광택의 불꽃무늬와 하단의 청중도상도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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